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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부정 마케팅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사업자가 사업의 와중에 매출을 계속 늘리기 위해서는 신상품을 팔아야 하기에 여러 활동을 하는데 이를 위해 과거 제품을 버리게 해야 하는 것에 이르러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과거 제품에 좋지 않은 인식을 고객에게 심기우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 소비자들은 구제품을 버립니다. 

제품의 교체주기를 빠르게 하는 것으로 사람의 심리작용을 부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GDP라는 성장의 척도가 지구 공동체에 중요한 지표로 작용하는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그래야 한다는 지식인 등의 담론의 결과물에 의해 거의 모두는 계속 성장을 지향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해야 하며 가격을 올려가기도 하는 풍조를 무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제의 확대 성장이 긍정으로 여겨짐과 때로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 이 또한 산업의 한 분야의 파급을 증가하게 하며 그렇게 계속 세상은 확장되어 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과식과 탐식 등의 수고로움의 결과로 온갖 질병 등에 고통 하면서도 이에 대한 치료 산업이 함께 성장한다는 아이러니로 변론해 가는 모습과 같은 선상인 것일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지식이 발전하면서, 글쎄 진정한 발전인지는 의문이 있음에도, 여러 긍정과 함께 부정적인 등장에 관한 것이라고 보이며 이는 사람의 편견을 증폭하게 하는 것과 같은 선상으로 보입니다.

 

역사의 적지 않은 일례 가운데, 마녀 사냥 등과 같은 것으로 이 세대에는 부정적 고도 마케팅도 일부 같은 선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진짜 악은 제어되어야 함에도 그런 체험에 노출된 과거의 기억에 함몰하여, 보이는 일부 유사함을 가지고 동일하게 판단해 나가는 그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높아진 소비자 심리 작용의 이해를 사용하여 의도한 것의 방향을 향하게 하는 것으로, 여러 심리 전략 전술 내지는 개인 가정 사회의 우울화를 포함하여 여러 부정을 목적으로 해 폭력 자살 자해 가해 등을 이루게 하는 보이지 않은 흐름 작용을 이루어 좋지 않게 하는 인간성 상실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 유명한 주제인 가스 라이팅 도 같은 선상의 기법인 것일 것이다. 모든 이가 알게 모르게 삶 가운데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을 지닐 수 있음에도 대체로 의도적이며 지속적이며 타인에 악의적인, 때로는 이도 못 알아차리는 습관화로 인해 무지하며, 모습을 지니고 누군가를 자신의 주장에 따르게 만들거나 하는 것 등이 그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런 경우는 때로 있을 수 있어도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모습의 지속은 문제이며 제어와 치료되어야 할 것입니다. 

 

흔히 물은 중요한 것인데 생명체가 먹으면 생명 유지이고 뱀이 먹으면 독을 만든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맞기도 하지만 글쎄 이를 절대화 하는 것은 부적절한 비유인 것입니다. 독사는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이며, 같은 선상으로 용맹과 기상의 상징 등으로 운운되는 사자 호랑이 등 맹수는 물을 마시면 다른 생명체를 해한다는 주장은 어떠한가요 과연 다른가요. 고유의 본성에 충실한 것 아닌가요.

맹금류가 식물을 먹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며 식물을 먹는 동물이 육류를 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요. 물론 그 것들을 포획하여 어렸을 적부터 반대의 것을 먹여 성장시켰다면 어느 정도 가능한 논증일 수 있어도 평생 인위적인 울타리 내에 키울 것이 아닌 이상 일반화는 분명 무리인 것입니다. 각 생물이 그렇듯 긍정 부정이 혼재하는 것입니다. 양면성이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편견이 없을 수 없으나 이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고착화하는 표현, 나아가 이런 것에 노출되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 편견을 키우는 사람이 또한 문제인 것이다  

 

흔히들 사용하는 음료 자동차 물건 등의 브랜드가 있습니다. 어느 독재자 악인으로 평가 받는 누군가 그것을 사용하였다고 과연 그 물건과 브랜드가 진정 잘못인가요.

그렇지 않은 선량한 사람들이 같은 물건과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오직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 결과는 사람과 공동체와 사회 등을 잘못된 편견에 휩싸여 고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부정 고도 마케팅 기법을 사용하는 주체를 경계해야 하며 개인도 밝히 이런 모습을 알고 스스로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진정 좋지 않고 악하고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무언가를 예로 드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일도 그러합니다. 특정 날짜에 관련하여 어느 누군가 기념일이 같다고 과연 그 날이 모두 그 개인의 같은 기념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악인과 선인이 같은 날 태어나고 죽을 수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장소는 그렇지 않은가요 이름은 외모는 어떠한가요.  

여러 변수 가운데 한두 개를 놓고 그 전체를 평가하게 하는 가르침은 그래서 온전하지 못하며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않으려 하고 무시함은 악하기도 한 것입니다. 양쪽 모두 그런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 의도의 요소가 많은 무언가에 대해서는 저항 대항 피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며, 좋은 것을 쫓으려는 모습이 있는 이유가 합당함의 근거일 것입니다.

 

과거로부터의 여러 방법론을 넘어 근래 AI의 세대에 점차 진입하며 의도적인 알고리즘 등 불순한 특정 계획화로의 변경 의도 등을 이루려는 모습은 좋지 않은 부작용과 같은 선상이라고 가늠해 봅니다. 이런 모습에 노출되어 행동하는 인생의 모습도 적지 않음에 유의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반복학습의 세뇌가 같은 선상일 것이며, 그래서 좋은 것을 보는 노력을 지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력 얘기가 나와서인데, 선천적을 넘어 사고 등 삶 가운데 얻게 된 어떤 잘못된 체형 부분을 지속적으로 교정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수술이라는 커다란 접근에 들지 않기를 바램으로, 더 나빠지지 않고 때로 향상을 이룰 수 있음과 같이, 사람의 긍정적인 생각 사고의 흐름 습관을 통한 교정 노력으로 어느 정도 회복 개선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은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하라고 하심이 대표적인 그리스도인을 향한 노력에 관한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한두 가지 선한 일 한 것으로 선인이라 하는 것도, 한두 가지 잘못을 하였다고 악인이라 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을 것 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을 수 없는 인생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전체 가운데 그 비중을 보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해 주라 (마 18:22)의 말씀은 무조건 용서해 주라는 것을 넘어 그 죄인이 다른 선한 일도 여전히 행하는 와중에 그런 잘못이 때로 등장하는 경우에 관한 것이지, 존재하는 기간 악행의 비중이 훨씬 더 많고 이를 거듭하며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인생을 향함은 아니지 않은가 가늠해 보게 됩니다. 이에 반하는 말씀 구절도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하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11)  좋은 것이 무엇인가요 내가 원하는 것인가요 아니 정욕에 쓰려고 바라는 것인가요. 삶 가운데 경계가 모호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을 주심인데 이도 너무 욕심과 탐심에 근거한 것이면 당연히 성령의 역사는 아닌 것이며, 무엇이든지 구하라 고 하심의 말씀에 기대어 하여 탐심에 근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얻은 무언가를 포장하며 미화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가 혼재하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이 과연 진정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런 접근은 그럼 온전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오직 주께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기에 그렇지 않은 모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과 그렇지 않은 영으로부터 혼재하여 오는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마다 삶의 모습을 가늠하며 그 비중을 검증하는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과연 언급한 곳이 전부인가요, 여전히 삶 가운데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어디 인가요.

 

물론 악인이 사용한 무엇 장소 이름 것 등에 불편함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이와 어른과 미숙과 성장과 성숙함의 차이는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같은 것을 사용해 좋은 것을 내고 누군가는 악한 것을 냅니다. 그렇다고 그 것이 어느 한쪽만 있을 것이라는 것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물건이 정반대의 목적으로 사용 가능하듯이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때로는 그 반대가 될 여지는 있기 때문을 이를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길가는 사람들 중에 선인과 악인이 외모로 쉽게 구별이 되며 몇 행동으로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과도한 평가에의 집착은 삶을 무척 피곤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일반인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서로를 소통하며 대하는 것일 것입니다. 일반인이라는 것은 곧 잘잘못 모두 지니고 있는 그런 존재이며 그럼에도 좋음이 좋지 않음보다 더 많은 경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그렇고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 많고 논쟁이 적지 않은 모습을 보면 좀 의문이 듭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 것 인가요. 과도한 자기 우월감 등이 있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와 배경은 무엇인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눅 6:41 42) 

 

그러하기에 삶이 그렇게 불만과 논쟁이 적지를 않은 것 같습니다. 당연히 좋지 않은 영의 역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에 들보가 있음에도 우리는 타인의 티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분쟁과 논쟁 등이 삶 가운데 존재 가능한 것이며 나아가 각종 미디어, 산업 등은 그 출발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을 필요로 하며 이에 근간하여 존재 유지하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입니다.

 

피해야 할 어리석은 삶으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평가 비난을 넘어 가해에 이르는 모습일 것입니다. 앞뒤 전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욱하는 성질에 무언가를 행하는 삶과 같이 어리석은 인생은 없을 것이며 나아가 그런 화풀이로 타인을 희생하게 하였다면 그 죄값과 스스로의 어리석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타인의 티를 뺀다고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이며 나아가 주변의 들보를 제대로 분별 못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래 봅니다. 한 사람 당사자의 말만 듣고 행함이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누군가의 주장이 옳아 보이고 신뢰가 들어도 그 외에 몇 사람의 신뢰의 증빙을 통해 평가해야 하는 신중함이 인생에 중요한 덕목인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죄악을 잊을 수 있기에, 잊기 위해 그와 같이 타인을 괴롭게 하는 어리석음에 듭니다.  잘잘못을 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며 그러려면 신중하고 충분한 증거에 기반하여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이 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과연 인생가운데 누가 그럴 자격이 있나요 라는 반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맡기라는 것이며 나아가 인생은 그 원수도 포용하고 사랑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음을 압니다.

결국 인생 간에 불협화음의 거의 끝장은 곧 전쟁인 것입니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그 모두 피해 당사자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인생에의 심판의 궁극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할 수 있는 한 서로 화평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게 되어도 인생의 기간에는 고난이 때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한 삶을 살던 사람이 악인을 발견하고 모질게 대하였다가 그도 스스로 악인의 반열에 올랐다고 합니다. 악인을 징벌하였다고 스스로 선인 같다고 여겨지시나요 과연 그러한가요.

기독교 역사 가운데 적지 않은 무명 유명을 넘어 그리스도인이 그 과거에는 악인이었음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죄로부터 회개한 인생이 도리어 천사들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기에 아이러니면서도 조심해야 할 이유이며 나아가 이를 잃지 않는 삶의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악인이 죄사함에 이름도 아님을 압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사후에 천국에 들기가 그 만큼 어려운 일인 것이며 언급하시는 리더급의 십사만 사천이라는 상징적 모습에 들기는 얼마나 그러하겠습니까.

 

인생이 그렇게 한계가 있기에 올바른 지침인 성경의 말씀을 주셨으며 나아가 이도 말씀 몇 구절로 모든 것을 대체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에도 복음을 전하시는 주께서 고정관념에 휩싸임을 넘어 이에 함몰된 인생들을 향하여 유사한 논쟁을 행하심을 통해서도 이런 고착과 잘못된 편견에의 모습은 적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 인가요.  의학자 과학자 등의 역할인가요 아님 영혼의 의사의 역할인가요. 물론 이런 분들의 존재 이유이며 함께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과도하고 잘못된 갈등을 유발 조장하는 모습은 주로 어디에 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이며 스스로는 어떤 모습인가 가늠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아가 심한 경우에는 알맞은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일깨움과 행함을 얻으면 좋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Apr 2023